역사저널 그날 423회 미리보기

 

전두환, 과외와의 전쟁을 선포하다

 

“입시지옥과 과열 과외에

시달려서는 안 되겠으며...”

 

시험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않는 유일한 나라,

대한민국. 매년 11월이면 온 국민의 관심이

수능으로 쏠리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 주관

대학 입학시험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그 서막을 열기 위해서는 전두환의 이름이

빠질 수 없다는데...

1980년, 대한민국은 과외 망국론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7월 30일,

신군부 주도의 국보위는 야심 찬 계획을

내놓는다. ‘과외를 전면 금지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시행된

과외 금지,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전설의 82학번을 아시나요

정계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전설의 ‘82학번’.

원희룡, 나경원, 조국...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학력고사 1세대라는 사실! 한순간에

달라진 입시 제도 때문에 혼란을 겪었을

수험생들은, 훗날 ‘전설의 82학번’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여기, 험난한 시기를 거쳐

최초의 학력고사를 치렀던 또 한 명의 산증인이

있다. 바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성격파 배우 이재용! 고2 늦둥이 아들이

‘큰별쌤’ 최태성의 찐팬?!

평소 <역사저널 그날>을 즐겨 본다는

이재용과 함께 역사 속 그날로 떠나 본다.

 

 

 

 

7.30 교육개혁 조치의 속내

국보위가 내세운 파격적인 교육개혁 조치!

가장 큰 골자는 ‘과외 금지’ 그리고 ‘본고사 폐지’.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본고사.

1979년 서울대학교 본고사 문제를 패널들이

직접 풀어보는 시간을 가졌다는데...

과연 이들의 점수는?!

반면, 과외 금지를 엄중히 단속하기 시작한

국보위. ‘과외시키면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겠다!’ 강력한 처벌을 경고하며 과외가

전면 금지되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떠도는 소문이 있었다. 바로,

‘전두환의 딸도 과외를 한다?’

 

K-입시의 변곡점, 학력고사

7.30 교육개혁 조치로 시작된 ‘학력고사’.

대학별 본고사가 없어지고 국가가 직접

대입 시험을 관리하게 된 것.

그리고 이 학력고사는 수능의 원형이 된다.

K-입시의 시작, 학력고사가 시작되면서 일어난

중위권 학생들의 반란? 수능 날마다 흔히

볼 수 있는 엿, 찹쌀떡, 포크 등의 문화도

이때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8월 27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423회

‘전두환, 과외와의 전쟁을 선포하다’>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방송일시 2023년 8월 27일 21:40

 

 

[출처] kbs

 

반응형

 

역사저널 그날 422회 미리보기

 

삼성가(家) 셋째 이건희의 승부수, 반도체

 

삼성가에도 ‘왕자의 난’이 있다

‘왕자의 난’ 하면 떠오르는

조선 태종 ‘이방원’과 ‘현대’.

그런데 삼성 그룹에도 ‘왕자의 난’이라 불릴만한

사건이 있었다. 그 배경은 바로

1966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카린 밀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 이병철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차남 이창희는 책임을 지고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어진

<청와대 투서 사건>으로 두 형들을 제치고

후계자가 돼 경영 심판대에 오른 이건희.

그는 자신과 삼성의 미래를 건 무모한 도전에

나서게 된다.

 

“각하, 이거 보이시죠?”

일타강사 곽재식 교수의 반도체 특별 과외

 

삼성 경영진과 아버지 이병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도체라는 승부수를 내건 이건희.

그의 설득으로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사업 진출을 결심한다. 하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꼭 필요했는데 당시 관료들

역시 그 필요성을 느끼고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을 설득시키기에 나서는데...

1981년 5월, 청와대에서 있었던 ‘각하 맞춤형

반도체 특강’을 완벽하게 재연한다.

 

 

 

 

반도체 사업의 시작도 ‘한 걸음’부터?

1983년 2월, 이병철 회장은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 사업 진출을 천명한다. 그러나

기존 반도체 선진국들은 삼성을

과대망상증 환자로, 또 ‘반도체 사업에

성공할 수 없는 이유’를 분석한 보고서까지

펴내며 냉소를 보낸다. 과연 삼성은

가장 먼저 무슨 일부터 시작했을까?

무박 2일의 <64km 행군>에서

삼성판 ‘모세의 기적’까지, 간절함이 만들어낸

놀라운 이야기를 들어본다.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전쟁,

마지막에 웃는 자 과연 누구인가?

 

1983년 12월, 삼성은 우리나라 최초의

반도체인 64K D램을 세계에서 3번째로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바로 찾아온

위기. 천억 원이 넘는 누적 적자를 기록하며

그룹의 앞날마저 위태로운 상황. 이 치열한

반도체 전쟁 속에서 삼성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8월 20일 일요일 저녁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422회

<삼성가(家) 셋째 이건희의 승부수,

반도체>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방송일시 2023년 8월 20일 21:40

 

 

[출처] kbs

 

반응형

 

역사저널 그날 421회 미리보기

 

광복절 기획

전두환, 히로히토를 만나다

 

대한민국 대통령 전두환, 일본 천황을 만나다

 

1984년 9월 6일, 서울에서 대규모 환송 행사가

열린다.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떠나는

대통령 전두환을 위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일본을 국빈 방문한

전두환은 일본 측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하네다공항에 도착한다. 전두환이 머문

영빈관을 가장 먼저 찾은 인물은 바로

히로히토 천황. 대한민국 대통령과

일본 천황이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히로히토는 한일 과거사에 ‘유감’을 표명하고

전두환은 이에 화답하며

새로운 한일 관계를 예고한다.

 

일본에 맞선(?) 전두환, 100억 달러를 요구하다

전두환 정부가 출범한 지 약 한 달이 된 1

981년 4월, 전두환은 일본에

차관 100억 달러를 요구한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 정부는 황당할 따름.

당시 100억 달러는 대한민국의 1년 예산과

비슷한 금액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이

100억 달러를 요구한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그리고 사실 이 100억 달러

아이디어는 일본 측에서 제공했다는데...

전두환의 귀를 솔깃하게 만든

100억 달러 아이디어는 대체 무엇이고,

왜 일본은 그런 아이디어를 제공했을까?

 

 

 

 

안 되면 될 때까지! 계속되는 한일 차관 협상

100억 달러 차관 요청에 당시

일본 스즈키 내각은 차관을 제공할 명분이

없다며 한국의 차관 요청을 거절한다.

1년이 넘도록 계속된 한일경제협력차관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일본에서 한 남자가 등장한다.

1983년 1월, 이 인물의 등장과 함께

한일경제협력차관 협상은 급물살을

타게 되는데... 그 한 남자는 누구일까?

 

같은 결과 다른 마음, 한미일의 동상이몽

1981년 4월에 시작해서 한때 중단 위기까지

맞았던 한일경제협력차관 협상은

1년 8개월 만에 합의에 이르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껄끄러웠던 한일 관계도

급속히 개선되기 시작한다. 이때 이루어진

전두환과 나카소네 한일 양국 정상의 만남은

오늘날 한미일 삼각 안보 체제와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만들어지는 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는데...

2023년 8월 13일 일요일 저녁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421회

<광복절 기획 – 전두환,

히로히토를 만나다> 편에서 자세히 알아본다.

 

방송일시 2023년 8월 13일 21:40

 

 

[출처] kbs

 

반응형

 

역사저널 그날 420회 미리보기

 

전두환, 김일성의 구호 물품을 받다

 

“가수로서 평양 가서 노래하는 게 소원”

1984년, 전두환은 김일성의 구호 물품을

수락한다. 북한의 수재 물자 지원으로

팽팽했던 남북 관계는 평화 모드에 들어선다.

1985년 9월 20일부터 남북예술단과

고향방문단이 서울과 평양을 각각 방문했다

. 분단 40년 만에 이루어진 첫 방문이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만 참여할 수 있다는

남측 예술단. 그중 당당히 이름을 올렸던

하춘화가 직접 <역사저널 그날>을 찾았다는데...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

한국 가요계의 영원한 여왕 하춘화와 함께

1985년 평양으로 떠나 본다.

 

서울 시내를 강타한 태풍 준(June)

1984년 8월 31일. 서울, 경기, 충청 일대에

유례없는 집중호우가 내렸다. 한강은

위험수위를 훌쩍 넘기고, 도로와 집은

물에 잠겼다. 189명 사망, 150여 명 실종,

2천억 원 이상의 재산 피해 및 23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최악의 홍수였다.

충격에 빠진 대한민국, 이때 북한의

구호 물품이 도착하는데...

자칭 홍수 전문가(?) 박건호 컬렉터와 함께

당시의 피해 상황 및

북한의 구호 물품을 살펴본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평양 방문 비하인드

1980년대 북한은 대규모 건설 사업으로

어려운 경제 상황을 겪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월등하게 잘 살던 시기!

그렇다면 김일성은 왜, 구호 물품을

보내겠다는 제안을 했을까?

한편, 1985년 평양을 방문한 하춘화!

호텔에 준비된 베개를 보고 깜짝 놀란 사연은?

가깝고도 먼 북한. 같은 말을 쓰면서도,

문화적 차이는 있었다. 덕분에 발생한

웃지 못할 인터뷰 영상이 있다는데...

북한은 해수욕을 묘향산으로 간다?!

 

마침내 성사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

1985년 9월 22일, 첫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다. 40년 만에 가족을 만난 이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탄식의 눈물을 흘렸다.

수많은 이산가족 중 이날 혈육을 만날 수 있던

사람은 고작 65명에 불과했다.

눈물로 가득한 첫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게 된 계기, 그 뒤에는 극비리에

진행된 남북 특사들의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진행하게 했던 전두환. 그는

사실 첫 남북정상회담의 주인공이 될 뻔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7월 30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420회

‘전두환, 김일성의 구호 물품을 받다’>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방송일시 2023년 7월 30일 21:40

 

 

[출처] kbs

 

반응형

 

역사저널 그날 419회 미리보기

 

대도라 불린 사나이, 조세형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대도의 등장

1983년 4월, 대한민국은 한 도둑의 등장으로

충격에 빠진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구치감을

빠져나와 신출귀몰한 탈주극을 벌인 그는

단순한 절도범이 아니었다. 범행 대상이

사회 최고위층과 부유층이었던 것.

괴력으로 지붕 위를 날아다니며 부잣집을 털어

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는 등의

가라앉을 줄 모르는 소문과 함께 어느새

‘대도(大盜)’라 불리게 된 사나이.

그가 바로 조세형이다.

 

이 귀한 보석이 단돈 OOO원?!

물방울 다이아몬드 미스터리

 

조세형의 절도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5.75캐럿의 물방울 다이아몬드다.

일반 다이아몬드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크기부터

우수한 투명도와 광택으로 모두가 높은 가격을

예상하는 상황. 그런데... 물방울 다이아몬드의

가격이 높게 책정될수록 소유주인 의뢰인은

당황한 기색을 드러낸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코너,

TV쇼 <진품명품 그날>의

명품 MC 강승화 아나운서와 함께

그 이야기를 상세히 파헤쳐 본다.

 

대도에게는 절도 원칙이 있다

1980년대 정재계에 만연한 부정부패,

정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려운 시기에

나타나 진짜 ‘큰 도둑’을 세상에 낱낱이 까발린

조세형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 상황. 기자들의

열띤 취재 끝에 알려진 그의 과거 행적 역시

그를 호감 있는 범죄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일조한다. 이 과정에서

조세형에게는 몇 가지의 절도 원칙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첫 번째로는 ‘가난한 사람은

털지 않고, 흉기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

두 번째는 ‘나라 망신을 시키지 않기 위해

외국인의 집은 털지 않는다.’ 이어지는

‘동료 도둑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판검사의 집은 털지 않는다’, 그리고

‘훔친 금액의 30%는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준다’. 언뜻 들으면 조세형이

의리 있는 도둑(?)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이 원칙들, 과연 실제로 지켜졌을까?

 

조세형은 임꺽정이 될 수 있을까?

15년이라는 긴 수감 생활 끝에 출소한

조세형은 일약 스타로 거듭나게 된다.

복역하는 동안 종교의 힘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목사가 되고, 심지어

국내 최대의 보안회사에 자문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한다. 이대로 개과천선의

아이콘이 되어 정말로 의적의 반열에 오르나

싶었던 그때, 일본으로 건너간 조세형이

체포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온다.

패널 모두를 놀라게 한 사건의 전말은

7월 23일 일요일 저녁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419회

<대도라 불린 사나이, 조세형>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방송일시 2023년 7월 23일 21:40

 

 

[출처] kbs

 

반응형

 

역사저널 그날 418회 미리보기

 

각하의 분노, 국제그룹을 해체시키다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비운의 국제그룹

1985년 2월 21일, 국제그룹의 해체 소식에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해체 당시

국제그룹은 20여 개의 계열사를 보유했던,

국내 10대 재벌 중 하나로 손꼽히던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그룹 해체 3년 뒤인 1988년,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은

국회 5공특위 청문회에서 그룹 해체의 부당함을

호소한다. 그룹 해체의 진짜 이유가 바로,

본인이 전두환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는 것.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된 비운의 그룹,

전두환과 국제그룹 사이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고무신에서 시작된 국제그룹 신화

1947년, 고무신 회사로 시작된 국제그룹은

왕자표 고무신에서 출발해 대한민국

운동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프로스펙스를

만들어낸다. 세련된 디자인뿐만 아니라

우수한 품질로 미국 내에서 6대 스포츠화로

선정되기도 한 프로스펙스 운동화!

 

 

 

 

1986 멕시코월드컵 당시 최순호 선수의

환상적인 골 장면에서도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찾아볼 수 있다고?! 그 시절, 국제그룹에서

생산했던 프로스펙스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을까. 40여 년 전 생산된

프로스펙스 운동화와 함께 신발에 담긴

그룹의 자부심을 들어본다.

 

국제그룹 해체·인수 과정의 미스터리

갑작스러운 그룹 해체의 공식적인 입장은

바로 엄청난 부채로 인한 경영부실.

국제그룹의 규모와 실적 대비 부채비율이

높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 당시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는데...

그룹의 해체 발표 이후 국제그룹 산하 22개

계열사는 여러 기업으로 분리 매각되고,

이 과정에서 수상한 점들이 목격된다.

주요 계열사를 인수하게 된 세 기업이

국제그룹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을 뿐만 아니라 경쟁사 없이 단독 후보로

떠오른 기업이라는 것. 과연 국제그룹 해체와

인수 과정에는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는 걸까.

 

사법사에 영원히 남을 국제그룹 해체 사건?!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은 국가의 공권력 행사로

자신의 기본권이 침해당했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한다. 그룹 해체로부터 8년 뒤인 1993년,

헌법재판소는 국제그룹 해체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고 이 판례는 사법시험의

단골 문제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는데...

이윤규 변호사와 함께 실제 사법고시에 출제된

국제그룹 해체와 관련된 문제를 분석해 본다.

 

국제그룹 해체를 둘러싼 자세한 이야기는

7월 16일 일요일 밤 9시 40분, KBS1TV

<역사저널 그날> 418회 <각하의 분노,

국제그룹을 해체시키다>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방송일시 2023년 7월 16일 21:40

 

 

[출처] kbs

 

반응형

 

역사저널 그날 417회 미리보기

 

대한민국을 뒤흔든 7000억 스캔들

<이철희 장영자 사건>

 

특보, 이철희 장영자 부부 구속?!

1983년 5월 5일,

한 부부가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이 부부의 이름은 이철희와 장영자.

이들이 은닉한 자금은 미화 40만 달러,

엔화 800만 엔이었다. 당시 가치로 약 5억이

넘는 금액. 그러나 이 부부에 대한 검찰 조사가

진행되면서 대한민국은 큰 충격에 빠진다.

이철희 장영자 부부가 국내 굴지의 기업들을

상대로 7천억 원 규모의 어음사기 행각을 벌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대한민국 예산의 10%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 상상조차 어려운

대규모 금융사기였다.

 

어음을 이용하다

이철희 장영자 부부는 어떻게 대규모의

금융사기를 벌일 수 있었던 걸까?

그 수단은 바로 어음! 어음이란 기업이

약속한 금액을 주겠다는 증거로 발행하는

일종의 지급보증서. 80년대 당시는

기업들 사이에 어음을 되파는 일이 빈번했는데,

이철희 장영자 부부는 바로 이 점을 이용한 것!

그렇다면 부부는 어떻게 어음 시스템을

이용했을까?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파헤쳐본다.

 

 

 

 

초호화 결혼식, 결혼 비용만 1억 원?!

1982년 2월 14일, 아시안 사파리클럽으로

정·재계 인사들이 몰려든다. 당시 최고급

사교클럽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이유는?

바로 이철희 장영자의 결혼식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국내 재벌급 기업 대표, 은행장,

국회의원, 전직 장성 등 120여 명이 참석한

초호화 결혼식의 비용은 무려 1억 원!

그러나 사실 이철희와 장영자 부부의 결혼식은

처음이 아니라고 하는데...

프로 결혼식 사회자 (?) 윤인구 아나운서와

함께 결혼식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않기를

당부드립니다”

 

이철희 장영자 부부가 벌인

희대의 사기 사건으로 대한민국은 큰 충격에

빠진다. 피해자들의 울분은 커져만 가고...

심상치 않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정부는

서둘러 내각 개편을 단행한다.

11개 부처 장관을 경질하고,

관련자 30여 명을 서둘러 구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권력과의 유착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의혹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는다.

결국 정부가 내린 특단의 해명 방법이

있었다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방송일시 7월 9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417회 ‘대한민국을 뒤흔든

7000억 스캔들 – 이철희 장영자 사건>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처] kbs

 

반응형

 

역사저널 그날 415회 미리보기

 

6.25 기획

스탈린의 전쟁, 김일성 남침을 허락받다

 

한국 전쟁의 총지휘자 스탈린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시작됐다. 그런데 김일성의

남침 계획은 독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는데... 배후에 있던 인물은 바로 당시

공산주의 진영의 최대 지도자 스탈린이었다.

남침을 원했던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여러 번

허가 요청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고 만다.

그런데 1950년 봄, 스탈린은 갑자기 마음을 바꿔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스탈린의 시선으로 본

한국 전쟁!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가 지금 시작된다.

 

 

스탈린의 방패, 중국

 

결국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한 스탈린.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걸었는데... 그것은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아오는 것! 서둘러

마오쩌둥을 만난 김일성은 스탈린의 뜻을

전한다. 하지만 이를 쉽게 믿을 수 없었던

마오쩌둥, 그런 그를 위해 스탈린은 친히

전문까지 보내온다. 스탈린의 전문을 받고

마오쩌둥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과연 스탈린의 전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중국에 전쟁의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던

노회한 스탈린의 책략을 살펴본다.

 

 

 

 

스탈린의 비밀 작전

 

마오쩌둥의 한국 전쟁 참전 동의로 마침내 전쟁이

시작됐다. 스탈린은 전쟁 허가 후 북한에게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덕분에 북한군 10개

보병사단이 무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독소전쟁에

참가했던 소련의 베테랑 군사고문도 20명가량

파견했다. 그런데 소련의 이와 같은 북한 지원에는

대원칙이 있었는데 바로 ‘절대 들키지 않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에서 소련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노력했던 스탈린. 그들이 이토록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위장과 암호 속에 숨겨진 그들의 실체가 공개된다.

 

강대국 대리전이 된 한국 전쟁

 

개전 후 공격 3일 만에 한강 이북의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하지만 다시 3일 동안 그곳에서

지체한다. 그사이 시작된 유엔군의 반격.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고 전세는 역전된다.

하지만 약 한 달 뒤인 10월 19일, 30여만 명의

중국군이 입북하며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데... 한국군의 작전권은 유엔군에게,

북한군의 작전권은 사실상 중국군에게 넘어간

상황. 국제전 양상을 굳혀가는 한국 전쟁.

강대국들의 개입 속에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장기화됐다. 남은 건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는 것, 하지만 공산주의 진영의

여러 이해관계 속에 휴전회담은 쉽사리 진행되지

않았다. 그때 전쟁의 향방을 바꾼 사건이

일어나는데...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한국 전쟁과 스탈린 이야기는

6월 25일 일요일 저녁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415회 <6.25 기획 –

스탈린의 전쟁, 김일성 남침을

허락받다>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방송일시 2023년 6월 25일 21:40

 

 

[출처] kbs

 

반응형

 

역사저널 그날 415회 미리보기

 

냉전의 비극 – KAL 007기 격추되다

 

KAL 007기 격추사건

1983년 9월 1일,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민간 항공기 KAL 007기 격추사건.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객 269명 전원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고, 소련 측의 거부로

비행기가 추락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은

아예 수색조차 할 수 없었다.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비극, 소련의 민항기 공격과 이후

소련의 납득할 수 없는 행태에 온 국민이

분노했다.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합동위령제

당일에는 10만여 명이 운집하여

소련 규탄 대회를 열기도 하였는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러 의문과 의혹만이

난무한 채 남은 사람들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뉴욕발-서울행 KAL 007기,

소련 땅을 침범하다?

 

1983년 8월 31일, 뉴욕 JKF 공항을 출발한

KAL 007기는 경유지인 알래스카주 앵커리지

공항에 도착한다. 예정대로라면 베링해와

쿠릴열도 아래를 지나, 최종 종착지인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해야 했던 KAL 007기.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KAL 007기는 원래의

항로를 이탈한 상태로 캄차카 반도

북동쪽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사건 발생 10년 뒤, 국제민간항공기구

ICAO에서 발간한 보고서 속에 적힌 항로 이탈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항공운항학과 정윤식 교수와 함께

그날의 진실에 대해 살펴본다.

 

 

 

 

KAL 007기를 둘러싼 프로파간다 전

여러 우연과 불운이 겹쳐 미국의 정찰기로

오인받은 KAL 007기. 사실 미국은 소련이

KAL 007기를 정찰기로 오인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 체제를 비난하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해당 격추사건을

이용해 전 세계 반공 분위기를 형성하려 했던 것.

이러한 미국 측의 반응에 소련은 격추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사건의 책임은

미국으로 떠넘기는 모습을 보이는데...

미-소 갈등의 정점기였던 1983년,

KAL 007기 격추사건을 둘러싼 당시의

시대적·국제적인 배경을 자세히 알아본다.

 

KAL 007기 사건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강대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수습조차 미흡했던

KAL 007기 격추사건. 우리는 사건의

피해자였지만 목소리를 높일 수 없었다.

사건 발생 40년이 지난 지금, KAL 007기가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건 무엇일까.

2023년 6월 18일 일요일 저녁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415회

<냉전의 비극 – KAL 007기 격추되다>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방송일시 2023년 7월 2일 21:40

 

 

[출처] kbs

 

반응형

 

역사저널 그날 414회 미리보기

 

할 말 많습네다! 미그기 타고 귀순한 이웅평

 

실제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1983년 2월 25일 오전 10시 58분,

서울 시내에 예고 없이 경계경보 사이렌이

울린다. 대한민국 영공을 침범한 비행체는

다름 아닌 북한의 미그-19기!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

그러나 미그-19기는 이내 귀순 의사를 밝혀온다.

휴전선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북한공군 조종사, 이웅평 대위였다.

 

목숨을 건 비행

이웅평 대위는 어떻게 삼엄한 경계를 뚫고

대한민국의 영공을 넘어올 수 있었던 걸까?

평안남도 개천 비행장에서부터 수원 비행장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0분! 그 긴박한 순간을

공군 출신 조항리 아나운서와

전직 공군 훈련비행단 교관 소승호 기장과

함께 리얼한 시뮬레이션 영상으로 재현해본다.

 

 

 

 

나, 할 말이 많습네다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어온 이웅평 대위,

그가 남한 땅에 첫발을 내딛고 꺼낸 말은

‘총에 맞지 않게 해주시오. 할 말이 많습네다.’

였다. 요격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고급 정보나 각종 무기,

장비를 가져온 탈북민에게 정부가 지급하는

‘보로금’. 당시 이웅평 대위가 보로금으로

받은 금액은 13억 6천만 원이라는데...

대한민국 역사상 유래 없는 보로금 액수.

과연, 이웅평 대위가 가져온 정보는 무엇이었을까?

 

운명을 바꾼 라면 한 봉지

귀순 열흘 뒤인 1983년 3월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이웅평 대위의

기자회견이 열린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

자리였다. 긴장된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이웅평 대위. 그는 귀순을 결심했던

이유를 밝혔다. 그 이유는 바로,

남한의 라면 봉지?!

기자회견 후 일약 스타로 떠오른 이웅평 대위.

그를 보기 위해 여의도 광장에 130만 명

이 모이기도 했다. 일 년에 강연 횟수만

900회!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에 패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6월 11일 밤 9시 40분

KBS1TV <역사저널 그날 414회

‘할 말 많습네다! - 미그기 타고

귀순한 이웅평>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방송일시 2023년 6월 11일 21:40

 

 

[출처] kbs

 

반응형

+ Recent posts